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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정보/티베트

청결하지 못한 어느 티베트 불교 수행자

티베트 불교 여성 수행자들을 소개하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보다 한 눈에 들어온 사진 한 장이 있었습니다.  소개 글에는 '촉니 낭첸 스님'이라고 되어 있었고 티베트 동부 캄 낭첸 지역의 여승려라고 했습니다. 연세가 있어 보였고 얼굴에는 세월이, 눈에는 어떤 힘이 느껴졌습니다. 머리는 길게 흐트러져 있고 옷은 티베트 불교 승려들이 입는 붉은 색 계열입니다. 


다른 공간에서 이 분의 사진을 소개했더니 '수행은 부지런함과 청결함도 필요하지 않을까요?과연 진정한 수행자인지..'라고 어느 분은 되묻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왕이면 겉모습이 청결하면 좋겠지요.



티벳 불교 여성 수행자들을 소개하는 외국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전해진 티벳 동부 낭첸 지역의 한 여승려.(사진/The Yoggni Project)



수도꼭지를 틀면 바로 물이 나오는 우리 환경과는 달리 티베트 지역은 열악한 곳이 아직도 많습니다. 춥고 자외선이 강하고 바람이 많은 기후 탓도 있고 기반 시설이 좋지 못하니 자주 씻지는 못합니다. 티베트 대도시는 사정이 그나마 좋습니다만, 외곽으로 나가면 매일 씻는다는게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세상 말로 꼬질꼬질한 티베트인들은 현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진 속 스님은 동굴이나 무문관 수행을 하시는 분으로 보입니다.  티베트 지역을 여행하다 비슷한 모습을 하고 계신 분들을 어렵게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수행자는 맑고 깨끗해야 한다는 '청결'이란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돕니다. 겉모습은 맑고 깨끗한 것처럼 보이는데 속마음은 온갖 독으로 물든 출가자들 모습도 오버랩됩니다. 소위 개폼은 잡고 다니면서 속은 시궁창같은 그런 분들 말입니다. 입만 부처인 출가자들은 한국도 그러하고 티벳에도 그러한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어떨까요? 겉도 속도 청결이란 단어와는 한참 거리가 있으니 더 딱합니다.


겉모습은 거지같은데 마음은 맑고 깨끗한 분들이 있습니다. 이 또한 어느 나라, 어느 종교이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속에는 겉모습은 거지일지언정 마음은 맑고 깨끗한 수행자가 아름답습니다. 그럴 때 '쳥결'한 수행자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금새 제 휴대폰 바탕 화면을 자리잡은 어느 수행자의 사진이 마음에도 자리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청결한 수행자는 못될지라도 윤회계의 수많은 중독 중에서 한 가지라도 벗어나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 단언컨대 최고의 상근기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정말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제를 놓고, 숙고하고 탐구하는 사람입니다.

    최고의 상근기는 카르마도 아니며, 공덕도 아니며, ‘선택’을 받아서도 아니며, 특정 민족도 아니며, 특정 종교적 신앙심도 아니며, 특정 수행과 고행도 아니며, 특정 지역도 아니며, 특정 문화도 아닙니다.

    대다수의 구도자와 수행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자기는 태어난 ‘누구와 무엇’으로 여기며, 즉 육체와의 동일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즉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고 여기면서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어린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를 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뭐냐 하면, 정말 나는 ‘무엇’일까? 정말 나는 ‘누구’일까? ‘이것이(육체) 정말 나일까?’하고 스스로 자기에 대해서 한 번 더 의심해 보고, 의문을 가져 보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거듭날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오해하고 있으며, 그 오해로 인해서 ‘거짓된 자기’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통찰은 ‘자기 불신’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 ‘지금의 자기’를 의심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최고의 상근기는 ‘도가 이렇다, 깨달음이 이렇다, 진리가 이렇다’ 이런 말을 늘어놓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는 ‘나는 무엇이다’에 머물지 말고 “나는 누구인가?”로 넘어오세요.

    이 말이 이해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누구이다’, ‘나는 무엇이다’에만 자기 ‘스스로’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순수합니까!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즉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자각’으로 이어지며, ‘자각’함으로 모든 것이 출발하고 ‘시작’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안다는 것이고, 자신을 안다는 것은 ‘홀로 독립적이다’라는 이해를 갖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존재’적인 측면에서는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해야만 하며, 설혹 ‘답’을 구했다 할지라도 그 ‘답’의 진위여부는 영원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지금까지의 동일시가 사라지고 나면, ‘나’는 ‘비존재’적인 측면으로서, ‘존재’적인 측면의 ‘주인’임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에 대한 자각은 완전한 ‘자유’라 할 수가 있습니다.


    -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합니다. www.uec2018.com
    인문학 도서인데, 한번 검토 부탁드립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